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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강 건너 저편 정하상 바오로 길 잃은 양 독립된 교구

by 현명한도미니카 2023.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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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 조선시대에 정치와 기득권들의 알력으로 천주교 박해가 있었다. 이 책은 참혹한 박해와 죽음 앞에서도 신앙에 충실했던 정하상 바오로 성인과 신앙선조들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흔들리는 세상, 물질문명에 물들어 있는 우리에게 한줄기 빛으로 다가온다. 성인의 생애를 살펴보고 그 당시 천주교인들이 애틋하게 신앙을 갈구하고 처절하게 교회를 지키는 모습을 묵상해 본다.

강 건너 저편  - 신중신-

정하상 바오로

정하상은 1795년 아버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어머니 유소사 체칠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 정약종과 형 정철상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참형으로 순교하였다. 신유박해는 정순왕후가 남인들을 숙청하기 위해 사학 엄금교서를 내림으로써 발생한 천주교 박해사건이다.

 

박해로 재산이 몰수되어 생계가 어려웠던 정하상은 어머니 유소사와 여동생 정정혜와 같이 숙부인 다산 정약용의 고향 마재에서 살았다. 친척들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는 정하상 가족을 좋아하지 않았다.

 

샤를 달래가 쓴  천주교회사에는  그리스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어려움을 당한 이야기가 나온다. 친척들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게 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는 것이다. 모친 유소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녀들에게 기도문을 가르치며 신앙을 유지하도록 격려하였다.

 

천주교 탄압으로 관련서적들이 소각되어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정하상은 함경도 무산에 귀양가 있는 조동섬을 찾아가 천주교와 학문에 대해서 배우게 된다.

 

그는 유일한 천주교 사제인 주문모 신부가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다는 인식을 하였다. 실제적으로 교회의 지도자가 된 그는 조선에  천주교 사제를 청하기 위해 역관의 종으로 위장취업을 하고 중국으로 갔다. 정하상의 애씀에도 1805년 중국에서도 교회박해가 일어나 선교사를 조선에 보낼 수가 없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국에 갔다. 1824년에는 교우이자 역관인 유진길이 동반하였다. 유진길은 학식이 있고 글도 잘 써서 정하상의 뜻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었다. 유진길이 쓰고 라틴말로 번역한 서신을 본 레오 12세 교황은 중국북경교구에 속해 있던 조선을 독립된 전교지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교황청에 직속시키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전교를 맡겼다.

 

정하상은 1825년 교황청에 조선의 독립교구 설치를 청원하였다. 교황그레고리오 16세는 이 청원을 받아들여 파리외방전교회 산하에 천주교 조선교구를 설립하여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뷔리기에르 주교는 모방신부, 샤스탕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835년 만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1836년 1월 모방신부가 조선 천주교인들의 안내로 입국하여 지도자인 정하상의 집을 숙소로 정하었다. 모방 신부는 앵베르 주고, 샤스탕 신부와 함께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신자들이 늘어나자 모방신부는 정하상의 도움을 받아 1836년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천주교회 신부후보로 선발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정하상에게 신학을 가르쳤다. 정하상은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9월 22일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모친 유소사와 여동생 정정혜도 같은 해에 순교하였다. 온 가족이 모두 그리스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길 잃은 양

대문채에 딸린 보잘것없는 문간방에 오갈 데 없는 오누이가 들어왔다. 어린 정하상과 여동생 정정혜였다. 아버지와 형님도 포도청에 갇히고 엄마와 함께 포도청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던 이들은 친척이 이 집에 데려다 놓은 것이다. 천주학을 받들었던 죄인은 대역부도로 다스린다는 어른들의 말을 듣고 맘을 졸이던 어느 날 엄마가 드디어 찾아왔다.

 

아이는 몰락한 집안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고 모친은 희망을 가진다. 옛날에 한 아이가 있어, 내일은 오늘보다 다르리라 믿으며 살았네. 조선에 사제의 필요성을 느낀 정하상은 동지사 사절단에 하속배를 자청하여 역관의 무임마부 자리를 얻어 중국으로 간다.

 

당시 청국도 천주교를 배척하고 있었기에 현석문이 전해준 주문모 신부를 조선으로 입국시켰을 때 일화를 참고하여 주교좌성당을 찾아간다. 그래도 우호적인 주교대리 리베이로 신부에게 신유년 박해가 일어나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하였다.

 

선왕의 승하와 이린 새 왕의 등극, 대왕대비의 수렴청정과 시벽파 간의 당쟁, 유교와 천주교 교리와의 차이로 인한 조상배향의 풍속 등이 있다. 정하상의 애씀에도 천주의 뜻을 기다리라는 이야기만 듣고는 실망하고 돌아선데. 성직자를 모셔와서 성사의 봉행하고자 갈망하고 있는 교인들을 생각하니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정하상의 백부댁은 전주교를 미워한 탓에 신유년의 적굴레에서 벗어났다 사위 황사영이 연루되었기에 지방 관아의 눈총을 받긴 했지만 더 큰 말썽은 없이 끝났다. 약전은 유배 중 세셍을 떠났고 악종은 늦게 입교했으나 열심하여 주문모 신부가  설립한 명도회의 회장이 되었다, 명도회는 평신도들의 교리 연구 및 전교를 위한 단체다. 

 

정약종은  체포되어 보름간 매질, 줄톱질, 등을 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1824년 정하상은 유진길과 함께 동지사의 일행으로 다시 중국 주교좌성당에 갔다. 주교좌 대리는 지난번처럼 리베이로 신부였다. 그날 유진길은 아우구스티노로 세례를 받게 된다. 그런데 같이 간 배점술은 빠지게 되고 정하상은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마음에 걸린다. 나중에 배점술은 배신하여 엄청난 피해를 끼치게 된다.

 

이번도 헛수고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하상은 마음이 무겁다. 증거자의 삶, 순교의 피야말로 천국에 드는 지름길이고 영생을 보장받는 은총이라는 데 낙망과 좌절은 너무 가까이 있고 천국은 지나치게 멀리 있다고 느껴진 것이다.

 

기다리던 일이 곧 성취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가 허물어질 때, 어떤 기쁨이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다가 거짓말처럼 사라졌을 때 사람들은 실망보다 더 가혹한 좌절을 맛본다. 단 것을 이미 맛본 사람은 그 맛에 대한 아쉬움으로 새로운 멍에를 지게 마련이다.

 

 

독립된 교구를 갖다

교황청 표교성성에서는 북경교구가 조선교구를 돌보고 선교사를 파견할 여력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유럽 각지 전교회에 실정을 알리며 조선교회를 맡아줄 곳을 찾는다는 공한을 보냈다.

 

여기에 호응하여 나선 곳이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파리 외방전교회다. 그뿐 아니라 한 전교 신부가 조선에 나가기를 자청하는 이가 있어 그를 주교로 서품 하여 조선 지역 사목을 맡겼다. 그의 이름은 브뤼기에르이며 교회법상 직책은 조선교구 초대 감목이었다.

 

이에 대한 교황의 제1교서에 이제 영구히 조선을 북경 주교로부터  온전히 독립시켜 새로운 대리 감목을 여기에 창설하는 것은 때를 얻는 것이라 생각하노라 라는 구절이 있었다. 드디어 조선은 독립된 교구를 갖게 된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동남아 태국에서 사목 중 사령을 받고 마카오를 거쳐 조선으로 들어오기 위해 중국 대륙을 여행하고 있다는 기별이 왔다. 또 다른 두 프랑스인 신부도 조선 부임 허락을 받고 조선 잠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인 신부도 한 명 있었다.

 

요동과 중국 책문의 교우촌 연락망이  활발히 가동되고 있어서 소식이 자주, 쉽게 전해졌다. 소식을 들은 영입 행동대는 여섯 명이 한성을 떠나 북행길에 올랐다. 의주에 도착해 정하상과 남이관, 신철은 책문으로 가고 유진길과 다른 두 명은 의주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중국인 유 신부를 모셔온 조선 교회는 활발하게 움직이며 성장한다. 그런데 유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 영입에 소극적이라 의구심을 갖던 중 주교님이 불행히도 이국의 낯선 지방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그리고 입국을 시도하고 있는 프랑스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서 유 신부를 영입할 때 경로를 따라 모방신부를 모시게 된다.

 

모방신부는 사리뭇골 하상의 집에 은거하며 그해 정월을 보냈다.  모방신부와 얘기를 하다 유신부가 신자들한테 소홀하고 자신의 공부에도 소홀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상은  신입교우가 생겼다는  개직골에 머물다가 숙부 약용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유 신부와 같이 간다. 약용은 종부성사를 받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 뒤 하상은 남이관과 유진길로부터 유신부의 탈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넋을 잃고 만다. 책임자인 모방신부는 유 신부를 중국으로 돌려보내기로 하고   중국으로 가는 길에 조선신부 후보로 뽑힌 김대건, 최 양업, 최방제를 신학생으로 데리고 갔다.

 

한동안 잠잠하다고 여겼던 천주교가 발흥을 하고 서양인 신부가 들어왔다는 소문을 접한  우의정 이지연이 헌종 앞에 주청을 하였다. 당시 헌종은 어린지라 대왕대비 김 씨가 정사를 보살피고 있었다. 대왕대비는 천주교에 대해 동정하는 마음이 있어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비교적 온건하게 처리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후 임금의 외조부 조만영이 실권을 잡자 김 씨 일파를 제압해야 한다는 생각에 천주교 탄압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의 책동에 힘입어 옥죄임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기해년엔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었다. 권득인 가족, 한성 교인들, 많은 교인들이 처형당하고 정하상은 천주교 박해가 부당함을 알리는 상재상서를 임금에게 올린다.

 

정하상과 유진길도 잡혀가고 두 외국인 신부도 체포되었다. 사형 시행 날짜는 두 외국인 신부는 9월 21일, 정하상과 유진길은 9월 22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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