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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필사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8장~9장)

by 현명한도미니카 2025.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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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주시는 생명

8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이는 육이 아니라 성령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채워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고난과 희망과 영광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부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관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믿는 이들의 확신

     그렇다면 우리가 이와 관련하여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바오로와 이스라엘

9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증언해 줍니다.  그선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영광, 여러 계약, 율법, 예배, 여러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저 조상들의 후손이며, 그리스도께서도 육으로는 바로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하느님의 이스라엘 선택

    그렇다고 하느님의 말씀이 허사로 돌아갔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다 그의 자녀가 아닙니다.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육의 자녀가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자녀라야 그분의 후손으로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악속이라는 것은 "이맘때에 내가 다시 올 터인데 그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하신 말씀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레베카가 한 남자 곧 우리 조상 이사악에게서 잉태하였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이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선택의 뜻을 지속시키시려고, 또 그것이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부르시는 당신께 달려 있음을 드러내시려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하고 레베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우를 미워하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느님 쪽이 불의하시다는 것입니까? 걸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사실 성경도 파라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이렇게 하려고 내가 너를 일으켜 세웠다. 곧 너에게서 내 힘을 보이고, 온 세상에 내 이름을 떨치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어떤 사람은 완고하게 만드십니다.

 

하느님의 진노와 자비

     이제 그대는,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왜 사람을 여전히 책망하십니까? 사실 누가 그분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을 것입니다.  아, 인간이여! 하느님께 말대답을 하는 그대는 정녕 누구인가? 작품이 제작자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또는 옹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한덩이는 귀한 데 쓰는그릇으로, 한 덩이는 천한 데 쓰는 그릇으로 만들 권한이 없습니까?  하느님께서 당신의 진노를 보이시고 당신의 힘을 알리기를 원하시면서도, 멸망하게 되어 있는 진노의 그릇들을 큰 은혜로 참아 주셨다면, 그리고 영광을 받도록 미리 마련하신 자비의 그릇들에게 당신의 풍성한 영광을 알리려고 그리하셨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렵니까?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유다인 가운데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도  불러 주셨습니다.  이는 바로 호세아서에서 말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자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고

       사랑받지 못한 여인을 '사랑받는 여인'이라 부르리라.

       그들에게 '너희는 나의 백성이 아니다.' 하던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리라."

  그리고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두고 이렇게 외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다 하여도 남은 자들만 구원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온전히 또 조속히 세상에 실현시키실 것이다."  이는 또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후손을 남겨 주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소돔처럼 되고

       고모라같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잘못된 열성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의로움을 추구하지 않던 다른 민족들이 의로움을,  믿음을 바탕으로 의로움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의로움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을 믿음으로 찾지 않고 행위로 찾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보라, 내가 시온에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을,

       부딪쳐 쓰러지게 하는 바위를 놓는다.

       그를 믿는 이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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